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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의 블로그

[월:] 2023년 10월

실패는 임시적이다. 포기는 영원하다.

“실패는 임시적이다. 포기는 영구적이다.” 로버트 기요사키 실패는 공기와 같은 존재다. 어떤 일을 하던지 성공과 함께 짝을 이뤄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포기는 실패 경험과 그로 인해 생기는 좌절의 과정을 거친 결과다….

“실패는 임시적이다. 포기는 영구적이다.”

로버트 기요사키

실패는 공기와 같은 존재다. 어떤 일을 하던지 성공과 함께 짝을 이뤄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포기는 실패 경험과 그로 인해 생기는 좌절의 과정을 거친 결과다. 문제는 포기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라는 것이다.

당신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무엇인가?

성공과 실패는 자신이 세운 기준으로 규정된다. 즉, 어떤 관점으로 내가 하는 일의 기준을 세우느냐가 중요하다.

물론 포기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목표의 부재, 자신감과 자존심 하락, 기회비용 상실에 대한 두려움 등등. 하지만 내 경우 가장 큰 요인은 다른 것이었다.

과거에 나는 포기를 밥먹듯이 했다. 실패에 대한 맷집이 약한 편이었다. 한 두대 때려 맞으면 바로 포기 상태가 되었다. 포기는 습관이 된다. 더 이상해봤자 무의미하다는 절망 끝에 포기는 웃으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내가 세운 성공과 실패를 규정짓는 기준은 ‘승패’였다. 승리하지 못하면 자신감과 자존심이 무너지는 상태. 왜 그렇게 승리에 집착했었는지 몰랐었다.

하지만 최근 강점 테스트로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하더라도 남과의 비교에서 졌다고 생각하면 실패했다고 규정하는 성향’이 반영된 결과였다.

승리와 패배는 상대적 비교로 완성된다.

승패는 경쟁 상대와의 비교로 결정된다. 다들 알겠지만 비교라는 감정에는 끝이란 게 없다. 한 명을 제끼면, 더 잘하는 사람이 표적에 들어온다. 나는 시작할 때 목표를 크게 잡는 편이었다. 그러니 실패 확률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목표를 작게 잡는 건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니까.

요즘은 승패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남과의 승패가 중요하지 않다. 내 수준의 향상 자체가 너무 즐거운 일이 되니까.

승패에 연연하지 않으면 생기는 일

물론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레벨 정체기는 분명히 오기 때문이다. 수준 향상은 계단식으로 점프하는 패턴을 보인다. 수준이 높아질수록 정체시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다. 그래서 그 정체기를 이기지 못해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최소한 타인과의 비교로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것보다는 더 오랫동안 그 일을 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수준이 더 이상 오르지 않는 순간이 왔을 때 포기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

“태수야. 살아보니께,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놈이 강한 거더라”

영화 <짝패> 대사 중

말맛나는 명대사가 많은 류승완 감독의 영화 <짝패>의 대사가 가슴에 박히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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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옷을 입고 노란 자전거를 탄 소녀

신호가 없는 아파트 입구 횡단보도를 건넜다. 빨간 자전거 도로가 포개진 도보가 나타났다. 상념에 잠긴 채 행인이 걷는 라인을 따라 조금 더 걸었다. 이상한 감각이 들어 문득 보니 맞은편에는 노란 옷을…

신호가 없는 아파트 입구 횡단보도를 건넜다. 빨간 자전거 도로가 포개진 도보가 나타났다. 상념에 잠긴 채 행인이 걷는 라인을 따라 조금 더 걸었다. 이상한 감각이 들어 문득 보니 맞은편에는 노란 옷을 입고 노란 자전거를 탄 소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살짝씩 비틀거리며 느릿한 속도로 오는 자전거 옆에는 한 아주머니가 소녀 방향으로 몸을 돌린 채 종종걸음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양팔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소녀는 다운증후군정확히는 모르지만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인지, 할머니인지 가늠되지 않지만 아주머니는 소녀가 넘어져 다칠까 노심초사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혹시 모를 사고로 행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고.

두 사람이 내 옆을 지나쳐갔고, 나는 정면을 주시하며 계속 걸었다. 자전거가 횡단보도 초입에 다가갔을 타이밍이 되었을 때. 자전거보다 몇 걸음 뒤쳐져 걸어오던 짙은 남색 정장을 입은 노신사가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와 동일선상을 지나 칠 때즈음 노신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어 조심조심. 내가 잡을께”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소에 어떤 마음으로 소녀를 보호하며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분들 인생의 무게를 감히 넘겨짚을 수는 없겠지만, 부모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느끼는 동질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미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안쓰러움이 더욱 깊게 서려 있겠지.

이기적인 생각일 수 있겠지만, 건강한 아이를 두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고 더 최선을 다하는 부모가 되자는 다짐을 했다.

노란 옷을 입고 노란 자전거를 탄 소녀에 댓글 없음

한쪽 바퀴 빠진 세발자전거

그때30대의 나는 몰랐다. 맹목적인 배려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40대 중반의 나 모든 사람은 본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나 역시 그렇다. 잘 살고 싶었다. 잘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는지 모른다….

그때30대의 나는 몰랐다. 맹목적인 배려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40대 중반의 나

모든 사람은 본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나 역시 그렇다. 잘 살고 싶었다.

잘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행복한 삶은 저 먼발치에서 계속 내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N극과 N극, S극과 S극처럼 한발 다가서면 한발 멀어지는 거리감을 절묘히 지키면서.

행복의 비결은 늘 가까이에서 웅크려 있다

간극을 좁히고 싶었다. 그래서 늘 고민이었다. 책을 읽고, 공부하며, 타인의 경험을 찾아다니는 시간을 한 해씩 쌓아갔다. 그렇지만 결국 행복은 내 손에 닿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의 남은 시간이 줄어들지 않을 때 느껴지는 답답함에 하늘을 책망했다. 나는 울음을 삼켰고, 행복은 계속 웃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답답한 존재였다. 눈을 가린 채 손에 닿을 만한 거리에 행복이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이렇게나 노력했는데 나는 왜 안되느냐’면서 억울함을 뒤집어 쓴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조금만 진정시키고 눈을 비벼 자세히 관찰만 했어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나,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타인과의 공생을 통해 살아간다’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나름 정리한 ‘삶의 정의’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당연한 내용이다. 그렇지만 조급함에 일상을 구조적으로 분석하지 못한 대가를 진하게 치른 후 깨닫게 된 소중한 결실이었다. 오늘은 이 결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 교류하면서 삶을 산다. 교류는 대화일 수도, 단순 거래일수도, 복잡한 비즈니스 일수도 있다. 물론 사랑, 슬픔, 기쁨 같은 감정도 주고받는 일도 포함된다. 결국 내 것을 남에게 주고, 남의 것을 받는 행위의 연속이 삶이다.

그래서 잘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관점에 대해 ‘내 생각’이 있어야 한다. 이게 없으면 불행에 가까워진다. 과거의 나 처럼 지금은 행복해지는 과정이라는 확신이 있다.

세발자전거를 잘 타는 방법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사주신 세발자전거를 신나게 탔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페달 밟는 힘과 요령이 생기니까 속도가 붙었다. 자연스레 자신감도 올라갔다. 나는 세발자전거를 빠르게 타는 게 재미있었다. 참 열심히 탔었지.

하지만 이내 관심이 시들해졌다. 이상하게도 자전거 속도가 느려진 시기와 맞물려 다른 트렌드 딱지치기 가 우리 동네 애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내 자전거 실력이 죽은 이유를. 이유는 오른쪽 뒷바퀴가 헐거워진 탓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탔다는 증거였다. 달리는 동안에 바퀴가 직선 경로를 못 그리고 난리블루스를 치면서 돌아가니 속도가 날 리 만무했다.

잘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나를 알고, 상대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자의 이익을 키우고 손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주고받는다.”

나를 아는 것은 앞바퀴, 상대를 이해하는 것과 주고 받는 것은 뒷바퀴인 셈이다. 이 세 가지가 빨리 달릴 수 있는 세발자전거의 바퀴처럼 잘 달려있어야 한다.

고객 퍼스트가 허망하다고?

거래는 마케팅 영역에서 활발히 다뤄지는 주제다. 대부분의 마케팅 전문가들은 소위 ‘고객 퍼스트’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들의 권위에 편승해 잘 되고 싶은 얄팍한 마음에 잠재고객의 니즈 needs, 없으면 죽는 것 와 원츠 wants, 없어도 살지만 원하는 것 를 연구하려고 끙끙댔다. 그에 비해 ‘나에 대한 이해’를 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책과 전문가가 ‘고객 중심’만을 외치진 않는다.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조언을 받아들이기엔 마음이 너무 급했다. 지금 행복을 낚아채지 않으면 영원히 잡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혜안이 있는 조언을 접할 때마다 ‘누가 그걸 몰라?’라던지, ‘응 중요한 건 알겠어. 그래서 다음은?’이라고 하면서 귀찮아서 넘겨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제 알고 있다. 거래 주체 중 하나인 나라는 사람 또는 브랜드 에 대한 자화상을 그려놓지 않으면, 타인의 마음을 채워주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왜 그럴까? 두 가지 정도 이유가 있다.

첫째는 버티는 힘의 부족이다.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생략했어도 남을 채워주는 데 성공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곳간을 채우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을 위해주는 걸 반복할수록 질려버릴 확률도 높아진다. 일정 기간 동안에는 분명히 기버 giver, 주는 사람 로서 살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이상 자기를 위한 본질적인 채움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경계의 모호함이다.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타인에게 어디까지 양보하고, 받아내야 할지 모른다. 서로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경계가 모호해 선명하게 행동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애매한 선의와 악의만 주고받을 수 있다. 그러니 상대방이 나와의 거래를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두 가지 생각에 닿는 순간부터 내 생각, 깨달음을 정기적으로 짚어보고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스위스 시계 장인은 루페 loupe 를 쓴다

나는 주머니에 확대경 하나를 들고 다닌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주머니 안에도 확대경 한 개씩은 들어있다.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사실이다. 그 확대경은 ‘왜 why라고 불린다.

‘왜’라는 질문은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정밀 확대경루페과 같은 역할을 한다. 다만, 누군가는 이 확대경이 자기 주머니에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산다. 또 어떤 사람은 주머니에 있는 건 알지만 꺼내 쓸 생각을 하지 않기도 한다. 만지작 거리기만 할 뿐이다.

기름 낀 루페

왜일까? 간단하다. 의도를 가진 다른 사람들의 각종 주장과 프레임에 가스라이팅 당해왔기 때문이다. 내 경험상 어떻게 보면 자발적 가스라이팅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30대의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 직접 생각하지 않아도 효과적인 방법을 알게 되는 시대에 중독되었다. 인스턴트 음식처럼 간편하고 빨랐으니까. 맹신하고 신봉했다. 그 결과 내 확대경에는 ‘편견’이라는 기름기가 잔뜩 끼게 되었다.

기분 나쁜 끈적한 무언가가 묻어나는 느낌이 싫었다. 그러니 웬만하면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고 살았다.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만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곤 했다.

엄지와 검지 끝으로 살며시 꺼낸 확대경은 이미 초점이 맞지 않은 상태였다. 현명한 사람들이 무조건 써야 한다고 권하는 ‘왜’라는 확대경이 왜곡된 것이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내면을 들여다볼 수도 없고, 편협한 시각만 제공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마음을 바꾸면 관점이 바뀐다

하지만 좌절할 필요는 없다. 아직 희망은 있다.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확대경을 사용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니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그러니 누구나 가능하다. 현실을 깨닫고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살게 된 영화 <메트릭스>의 네오처럼.

내 감정과 생각을 의도적으로 들여다보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잦아질수록 확대경은 점점 깨끗해지고 초점이 예리해질 것이다.

중독자가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

퍼스널브랜딩이나 브랜드를 만들어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가 있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아 우왕좌왕, 우당탕탕 해왔던 나는 실수를 반복해도 그 이유를 깨닫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내 생각이 없고 남의 생각에 의지해 살아온 당연한 결과였다.

모든 관계는 1대 1에서 시작된다. 비즈니스는 한 사람의 호감을 얻는 것에서부터 스타트를 끊는다. 하지만 나는 대중을 상대로하는 자동화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게 제일 현명한 삶이라는 생각을 했고, 자동화에 성공한 사람들의 경험을 소비했다.

‘대부분 무조건 OOO 할 거야’라는 편견을 타인 오디언스, 구독자, 고객 에게 씌운 후 방법을 찾으려고만 했다. 당연히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포기를 몰랐다. 다른 방법을 찾아 고액의 강의를 찾고, 컨설팅을 받았다. 그리고선 ‘이번엔 달라, 정말 좋은 방법을 알았단 말이야’라면서 또 시도했다.

흡사 새로 판돈이 생긴 도박중독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과거를 반복하고,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당신은 다르길 바란다.

앞바퀴만 컨트롤 하면 모든 걸 지배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내 오만한 자만심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믿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컨트롤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자신을 컨트롤하는 건 100% 가능한 일이다.

자아를 성찰하고 바뀌는 게 잘 사는 것의 시작이다. 바뀌어가는 나를 보면서 함께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태도도 자연스레 바뀐다. 당연히 맞지 않는 사람들은 떠난다.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좋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은 방향성이 바뀌고, 집중되어 결과 수준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모든 사람은 본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나 역시 그렇다. 잘 살고 싶다. 이제는 맹목의 눈가리개를 벗어던져버릴 때가 왔다.

한쪽 바퀴 빠진 세발자전거에 댓글 없음

올무에 걸린 동물에겐 기회가 없다

내 젊은 시절의 인생은 편견과 오만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고민을 자주 한다. 남은 40~50년 인생 물론 주어진다면 을 ‘후회’라는 색으로 칠하고 싶지는…

내 젊은 시절의 인생은 편견과 오만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고민을 자주 한다. 남은 40~50년 인생 물론 주어진다면 을 ‘후회’라는 색으로 칠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진지한’ 삶의 태도를 지향했던 과거의 나는 물론 지금도 지향점에는 다름이 없다.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면서 살았다. 그렇지만 내면을 단단히 하기 위해 해 왔던 생각의 결에 문제가 있었다. 수동적인 생각을 하면서 진지한 삶의 태도를 지향했던 것이다.

수동적 생각의 심보

수동적인 생각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수순을 밟는다. 선택을 하지 않으니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에 휘둘리며 살아간다. 당연히 자기 생각의 결과를 남에게 전가하며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어쩔 수 없이 책임을 지더라도 눈을 질끈 감으며 입 안으로 털어 넣는 쓴 가루약처럼 억지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곤 한다. 다만, 혜택은 최대로 받고 싶어 한다.

그렇게 나는 인내 없이 열매만 따먹고 싶어 하는 심보에 기인한 ‘가난한 마음’을 가지며 살았다.

생각은 향기를 남기고

돌이켜보면 ‘능동적인 생각’을 하면서 진지한 삶의 태도를 지향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과거의 내게 잔소리하는…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었겠지.

올해가 되어서 깨닫게 된 게 하나 있다. 삶의 태도에 수동적 향을 더하느냐, 능동적 향을 더하느냐는 ‘내 생각의 씨앗을 누구의 텃밭에 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알게된 다음부터 내 스탠스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텃밭이라니.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사람은 ‘생각의 씨앗’을 심어 키우는 농부다

생각의 씨앗은 사건, 사고, 현상 등의 경험을 계기로 뿌려진다. 그리고 자란다.

싫어하는 정파에 속한 정치인의 비리나 길거리에서 예고 없이 훅 들어오는 담배연기 등의 경험을 하면, 그때 느껴지는 감정이 생각으로 이어진다.

‘정치하는 놈들이 다 그렇지’, ‘거참 매너 없이 자기만 아는 사람이네’

이런식으로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생각이란 씨앗을 돌멩이에 묶어 던지면서 살아왔다.

그렇게 가시 돋힌 생각으로 당장의 스트레스를 털어버릴 수 있었다. 속이 조금 시원해지는 느낌이 괜찮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당시에 생각을 무기로 쓰지 않고 씨앗으로 내게 심었더라면 어땠을까. 최대한 애지중지하면서 키우지 않았을까?

애정을 주면 생각의 씨앗은 긍정적, 능동적 행동이란 결실을 맺는다. 내 삶의 태도에 긍정적이며 능동적인 향을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기회라고 생각조차 못한채 시간만 낭비하며 살아왔다.

내 텃밭에 생각의 씨앗을 심으면

불쾌한 경험이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면, ‘나는 윤리적으로 옳음을 추구하니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치인을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했겠지. 또한 ‘나는 건강한 사람이어야 하니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신 운동을 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더 현명했더라면 남에게 집중하느라 시간,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현상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다른 생각이 심어져 다른 행동, 다른 결과를 부른다.

내 생각의 씨앗이 타인의 텃밭에 심어지면, 과연 그 사람이 내 생각을 잘 키워줄까? 잡초 취급만 받는다. 본인이 심은 씨앗이 아니라서 그렇다. 어차피 남의 생각과 행동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 변화를 강제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 사람은 반발심에 내가 싫어하는 짓을 더 심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내 씨앗이 안쓰러워 본인의 마음만 타들어간다. 사람은 생각을 심는 농부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생각의 씨앗을 내 마음의 텃밭에 심었어야 한다. 한번 뿌려진 생각은 생명력이 강하다.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순간에도 뇌는 무의식 영역에서 생각을 무럭무럭 키운다.

오해는 말자. 내 탓을 하면서 살자는 게 아니니까. 내가 하게 되는 생각, 감정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편견’이라는 이름의 올무

동의 없이 남의 텃밭에 일방적으로 씨앗을 던져놓고 ‘제대로 키우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남에게 편견을 갖는다는 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자신에게 눈가리개를 씌우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다.

지난 십여 년간 도움도 안 되는 편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쳤는지 모른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편견으로 세운 기준을 고집해 왔다. 돌이켜보면 참 쓸데없는 고집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되도록이면 잊지 않으려고 한다. 생각의 크기와 성질은 그에 맞게 행동을 제한한다는 사실을.

남에게 편견을 씌운 순간부터 나도 그것을 기준 삼아 살아가야 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 그런 모순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로 작동하는 편견을 남에게 씌우면 씌울수록 올무가 되어 나를 결박하고 옥죄어 왔다.

이게 과거의 내게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다.

올무에 걸린 동물에겐 기회가 없다에 댓글 없음

‘모른다’라는 거짓말

대한민국 힙합신을 대표하는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를 떠올리면 ‘최자‘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에도 이런 단짝 친구들이 정말 많다. ‘그때 넌 무슨 느낌이 들었어?’ 적당히 친했던 그 사람이 물었다. 나는…

대한민국 힙합신을 대표하는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를 떠올리면 ‘최자‘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에도 이런 단짝 친구들이 정말 많다.

‘그때 넌 무슨 느낌이 들었어?’

적당히 친했던 그 사람이 물었다. 나는 ‘글쎄…’라고 잠시 머뭇댄 후 ‘모른다’라고 답변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 주제는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해당 질문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글쎄’와 ‘모른다’의 관계

‘글쎄’와 ‘모른다’는 단짝 친구다. 다이나믹 듀오의 랩 가사처럼 ‘불알 두 짝처럼 붙어 다니는 관계’다. 대답하기 껄끄러울 때나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곁들이면, 리얼 예능에서 자주 나오던 그 ‘마법의 가루‘와 같은 효과를 준다.

‘모른다’라는 답변은 질문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나는 어떤 계기를 시작으로 최근 사회, 경제에 관한 뉴스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래서 실제 일어난 사건, 사고 자체에 대한 질문에서는 ‘정말 모르기 때문’에 사용한다. 그렇지만 이건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건 감정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다.

당신의 감정은 안녕하십니까?

‘오늘 어땠어?’, ‘기분이 좀 그래?’, ‘오늘 좋아보이네?’

감정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대부분은 명확하게 설명 가능하다. 하지만 뭔가 잔잔해서 대답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이럴 때면 ‘글쎄… 모르겠어’라는 콤비를 소환하곤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다. 회피하고 싶어서. 특히 부정적 감정이 들었을 때 이런 반응을 자주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머지는 ‘구체적으로 쪼개서 감정의 원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삶의 맥락은 디테일과 시간이 쌓이면서 형성된다

‘내가 무언가를 안다’라고 생각하는 게 정말인지 착각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 내 생각을 말해보는 것으로 쉽게 판가름할 수 있다. 명확한 표현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개념과 ‘모른다’라는 대답의 맥이 닿아있다.

사실 내 순간적인 감정 상태는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긍정적,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를 몰라도 생기는 불편함은 별로 없다. 일상은 그런 감정과 상관없이 잘도 흘러가니까. 하지만 강에 모래톱이 생겨 물길의 형태가 결정되듯이 우리 인생에는 시나브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영향을 준다.

그래서 감정을 ‘왜’라는 돋보기로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는 과정은 꼭 필요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시간이 더욱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를 구성하는 감정의 이유가 쌓여갈수록 ‘내가 정말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뭔지라던가,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조금씩 덜 하면서 살 수 있어서다. 자아를 알아가는 시간과 방황의 시간은 반비례 관계를 가진다.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착각, 그래서…

그렇지만 검색, 소셜 미디어, 챗 GPT 등에 생각을 위임하는 생활이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편집해 놓은 생각을 숨 쉬듯 흡수하는 환경에 사는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른다. 오히려 인터넷 세상의 빅브라더빅데이터 플랫폼 기업, 정부들이 부모님보다 나를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두루뭉술하고 모호한 상태로 살아간다.

그래서 인생에서 좋은 질문을 할 줄 아는 친구가 필요하다. 감정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모른다’라고 대답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질문한 본인도 그렇게 대답하는 상황이 많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명확한 답변을 기대하고 질문했을 확률도 낮다. 답변한 사람이 ‘왜’ 모르는지에 대해 깊게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추궁하는 것 같아서. 서로 불편해지기 싫어서.

그런 면에서 나는 참 다행이다. 쌓은 덕도 없이 과분한 사람을 곁에 두고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감사의 말을 전한다.

‘모른다’라는 거짓말에 댓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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