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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무에 걸린 동물에겐 기회가 없다

내 젊은 시절의 인생은 편견과 오만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고민을 자주 한다. 남은 40~50년 인생 물론 주어진다면 을 ‘후회’라는 색으로 칠하고 싶지는…

내 젊은 시절의 인생은 편견과 오만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고민을 자주 한다. 남은 40~50년 인생 물론 주어진다면 을 ‘후회’라는 색으로 칠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진지한’ 삶의 태도를 지향했던 과거의 나는 물론 지금도 지향점에는 다름이 없다.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면서 살았다. 그렇지만 내면을 단단히 하기 위해 해 왔던 생각의 결에 문제가 있었다. 수동적인 생각을 하면서 진지한 삶의 태도를 지향했던 것이다.

수동적 생각의 심보

수동적인 생각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수순을 밟는다. 선택을 하지 않으니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에 휘둘리며 살아간다. 당연히 자기 생각의 결과를 남에게 전가하며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어쩔 수 없이 책임을 지더라도 눈을 질끈 감으며 입 안으로 털어 넣는 쓴 가루약처럼 억지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곤 한다. 다만, 혜택은 최대로 받고 싶어 한다.

그렇게 나는 인내 없이 열매만 따먹고 싶어 하는 심보에 기인한 ‘가난한 마음’을 가지며 살았다.

생각은 향기를 남기고

돌이켜보면 ‘능동적인 생각’을 하면서 진지한 삶의 태도를 지향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과거의 내게 잔소리하는…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었겠지.

올해가 되어서 깨닫게 된 게 하나 있다. 삶의 태도에 수동적 향을 더하느냐, 능동적 향을 더하느냐는 ‘내 생각의 씨앗을 누구의 텃밭에 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알게된 다음부터 내 스탠스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텃밭이라니.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사람은 ‘생각의 씨앗’을 심어 키우는 농부다

생각의 씨앗은 사건, 사고, 현상 등의 경험을 계기로 뿌려진다. 그리고 자란다.

싫어하는 정파에 속한 정치인의 비리나 길거리에서 예고 없이 훅 들어오는 담배연기 등의 경험을 하면, 그때 느껴지는 감정이 생각으로 이어진다.

‘정치하는 놈들이 다 그렇지’, ‘거참 매너 없이 자기만 아는 사람이네’

이런식으로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생각이란 씨앗을 돌멩이에 묶어 던지면서 살아왔다.

그렇게 가시 돋힌 생각으로 당장의 스트레스를 털어버릴 수 있었다. 속이 조금 시원해지는 느낌이 괜찮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당시에 생각을 무기로 쓰지 않고 씨앗으로 내게 심었더라면 어땠을까. 최대한 애지중지하면서 키우지 않았을까?

애정을 주면 생각의 씨앗은 긍정적, 능동적 행동이란 결실을 맺는다. 내 삶의 태도에 긍정적이며 능동적인 향을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기회라고 생각조차 못한채 시간만 낭비하며 살아왔다.

내 텃밭에 생각의 씨앗을 심으면

불쾌한 경험이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면, ‘나는 윤리적으로 옳음을 추구하니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치인을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했겠지. 또한 ‘나는 건강한 사람이어야 하니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신 운동을 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더 현명했더라면 남에게 집중하느라 시간,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현상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다른 생각이 심어져 다른 행동, 다른 결과를 부른다.

내 생각의 씨앗이 타인의 텃밭에 심어지면, 과연 그 사람이 내 생각을 잘 키워줄까? 잡초 취급만 받는다. 본인이 심은 씨앗이 아니라서 그렇다. 어차피 남의 생각과 행동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 변화를 강제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 사람은 반발심에 내가 싫어하는 짓을 더 심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내 씨앗이 안쓰러워 본인의 마음만 타들어간다. 사람은 생각을 심는 농부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생각의 씨앗을 내 마음의 텃밭에 심었어야 한다. 한번 뿌려진 생각은 생명력이 강하다.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순간에도 뇌는 무의식 영역에서 생각을 무럭무럭 키운다.

오해는 말자. 내 탓을 하면서 살자는 게 아니니까. 내가 하게 되는 생각, 감정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편견’이라는 이름의 올무

동의 없이 남의 텃밭에 일방적으로 씨앗을 던져놓고 ‘제대로 키우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남에게 편견을 갖는다는 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자신에게 눈가리개를 씌우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다.

지난 십여 년간 도움도 안 되는 편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쳤는지 모른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편견으로 세운 기준을 고집해 왔다. 돌이켜보면 참 쓸데없는 고집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되도록이면 잊지 않으려고 한다. 생각의 크기와 성질은 그에 맞게 행동을 제한한다는 사실을.

남에게 편견을 씌운 순간부터 나도 그것을 기준 삼아 살아가야 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 그런 모순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로 작동하는 편견을 남에게 씌우면 씌울수록 올무가 되어 나를 결박하고 옥죄어 왔다.

이게 과거의 내게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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