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40대 중반의 나30대의 나는 몰랐다. 맹목적인 배려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모든 사람은 본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나 역시 그렇다. 잘 살고 싶었다.
잘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행복한 삶은 저 먼발치에서 계속 내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N극과 N극, S극과 S극처럼 한발 다가서면 한발 멀어지는 거리감을 절묘히 지키면서.
행복의 비결은 늘 가까이에서 웅크려 있다
간극을 좁히고 싶었다. 그래서 늘 고민이었다. 책을 읽고, 공부하며, 타인의 경험을 찾아다니는 시간을 한 해씩 쌓아갔다. 그렇지만 결국 행복은 내 손에 닿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의 남은 시간이 줄어들지 않을 때 느껴지는 답답함에 하늘을 책망했다. 나는 울음을 삼켰고, 행복은 계속 웃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답답한 존재였다. 눈을 가린 채 손에 닿을 만한 거리에 행복이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이렇게나 노력했는데 나는 왜 안되느냐’면서 억울함을 뒤집어 쓴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조금만 진정시키고 눈을 비벼 자세히 관찰만 했어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나,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타인과의 공생을 통해 살아간다’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나름 정리한 ‘삶의 정의’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당연한 내용이다. 그렇지만 조급함에 일상을 구조적으로 분석하지 못한 대가를 진하게 치른 후 깨닫게 된 소중한 결실이었다. 오늘은 이 결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 교류하면서 삶을 산다. 교류는 대화일 수도, 단순 거래일수도, 복잡한 비즈니스 일수도 있다. 물론 사랑, 슬픔, 기쁨 같은 감정도 주고받는 일도 포함된다. 결국 내 것을 남에게 주고, 남의 것을 받는 행위의 연속이 삶이다.
그래서 잘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관점에 대해 ‘내 생각’이 있어야 한다. 이게 없으면 불행에 가까워진다. 과거의 나 처럼 지금은 행복해지는 과정이라는 확신이 있다.
세발자전거를 잘 타는 방법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사주신 세발자전거를 신나게 탔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페달 밟는 힘과 요령이 생기니까 속도가 붙었다. 자연스레 자신감도 올라갔다. 나는 세발자전거를 빠르게 타는 게 재미있었다. 참 열심히 탔었지.
하지만 이내 관심이 시들해졌다. 이상하게도 자전거 속도가 느려진 시기와 맞물려 다른 트렌드 딱지치기 가 우리 동네 애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내 자전거 실력이 죽은 이유를. 이유는 오른쪽 뒷바퀴가 헐거워진 탓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탔다는 증거였다. 달리는 동안에 바퀴가 직선 경로를 못 그리고 난리블루스를 치면서 돌아가니 속도가 날 리 만무했다.
잘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나를 알고, 상대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자의 이익을 키우고 손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주고받는다.”
나를 아는 것은 앞바퀴, 상대를 이해하는 것과 주고 받는 것은 뒷바퀴인 셈이다. 이 세 가지가 빨리 달릴 수 있는 세발자전거의 바퀴처럼 잘 달려있어야 한다.
고객 퍼스트가 허망하다고?
거래는 마케팅 영역에서 활발히 다뤄지는 주제다. 대부분의 마케팅 전문가들은 소위 ‘고객 퍼스트’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들의 권위에 편승해 잘 되고 싶은 얄팍한 마음에 잠재고객의 니즈 needs, 없으면 죽는 것 와 원츠 wants, 없어도 살지만 원하는 것 를 연구하려고 끙끙댔다. 그에 비해 ‘나에 대한 이해’를 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책과 전문가가 ‘고객 중심’만을 외치진 않는다.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조언을 받아들이기엔 마음이 너무 급했다. 지금 행복을 낚아채지 않으면 영원히 잡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혜안이 있는 조언을 접할 때마다 ‘누가 그걸 몰라?’라던지, ‘응 중요한 건 알겠어. 그래서 다음은?’이라고 하면서 귀찮아서 넘겨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제 알고 있다. 거래 주체 중 하나인 나라는 사람 또는 브랜드 에 대한 자화상을 그려놓지 않으면, 타인의 마음을 채워주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왜 그럴까? 두 가지 정도 이유가 있다.
첫째는 버티는 힘의 부족이다.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생략했어도 남을 채워주는 데 성공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곳간을 채우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을 위해주는 걸 반복할수록 질려버릴 확률도 높아진다. 일정 기간 동안에는 분명히 기버 giver, 주는 사람 로서 살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이상 자기를 위한 본질적인 채움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경계의 모호함이다.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타인에게 어디까지 양보하고, 받아내야 할지 모른다. 서로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경계가 모호해 선명하게 행동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애매한 선의와 악의만 주고받을 수 있다. 그러니 상대방이 나와의 거래를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두 가지 생각에 닿는 순간부터 내 생각, 깨달음을 정기적으로 짚어보고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스위스 시계 장인은 루페 loupe 를 쓴다
나는 주머니에 확대경 하나를 들고 다닌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주머니 안에도 확대경 한 개씩은 들어있다.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사실이다. 그 확대경은 ‘왜 why‘라고 불린다.
‘왜’라는 질문은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정밀 확대경루페과 같은 역할을 한다. 다만, 누군가는 이 확대경이 자기 주머니에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산다. 또 어떤 사람은 주머니에 있는 건 알지만 꺼내 쓸 생각을 하지 않기도 한다. 만지작 거리기만 할 뿐이다.
기름 낀 루페
왜일까? 간단하다. 의도를 가진 다른 사람들의 각종 주장과 프레임에 가스라이팅 당해왔기 때문이다. 내 경험상 어떻게 보면 자발적 가스라이팅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30대의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 직접 생각하지 않아도 효과적인 방법을 알게 되는 시대에 중독되었다. 인스턴트 음식처럼 간편하고 빨랐으니까. 맹신하고 신봉했다. 그 결과 내 확대경에는 ‘편견’이라는 기름기가 잔뜩 끼게 되었다.
기분 나쁜 끈적한 무언가가 묻어나는 느낌이 싫었다. 그러니 웬만하면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고 살았다.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만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곤 했다.
엄지와 검지 끝으로 살며시 꺼낸 확대경은 이미 초점이 맞지 않은 상태였다. 현명한 사람들이 무조건 써야 한다고 권하는 ‘왜’라는 확대경이 왜곡된 것이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내면을 들여다볼 수도 없고, 편협한 시각만 제공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마음을 바꾸면 관점이 바뀐다
하지만 좌절할 필요는 없다. 아직 희망은 있다.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확대경을 사용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니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그러니 누구나 가능하다. 현실을 깨닫고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살게 된 영화 <메트릭스>의 네오처럼.
내 감정과 생각을 의도적으로 들여다보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잦아질수록 확대경은 점점 깨끗해지고 초점이 예리해질 것이다.
중독자가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
퍼스널브랜딩이나 브랜드를 만들어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가 있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아 우왕좌왕, 우당탕탕 해왔던 나는 실수를 반복해도 그 이유를 깨닫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내 생각이 없고 남의 생각에 의지해 살아온 당연한 결과였다.
모든 관계는 1대 1에서 시작된다. 비즈니스는 한 사람의 호감을 얻는 것에서부터 스타트를 끊는다. 하지만 나는 대중을 상대로하는 자동화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게 제일 현명한 삶이라는 생각을 했고, 자동화에 성공한 사람들의 경험을 소비했다.
‘대부분 무조건 OOO 할 거야’라는 편견을 타인 오디언스, 구독자, 고객 에게 씌운 후 방법을 찾으려고만 했다. 당연히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포기를 몰랐다. 다른 방법을 찾아 고액의 강의를 찾고, 컨설팅을 받았다. 그리고선 ‘이번엔 달라, 정말 좋은 방법을 알았단 말이야’라면서 또 시도했다.
흡사 새로 판돈이 생긴 도박중독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과거를 반복하고,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당신은 다르길 바란다.
앞바퀴만 컨트롤 하면 모든 걸 지배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내 오만한 자만심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믿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컨트롤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자신을 컨트롤하는 건 100% 가능한 일이다.
자아를 성찰하고 바뀌는 게 잘 사는 것의 시작이다. 바뀌어가는 나를 보면서 함께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태도도 자연스레 바뀐다. 당연히 맞지 않는 사람들은 떠난다.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좋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은 방향성이 바뀌고, 집중되어 결과 수준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모든 사람은 본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나 역시 그렇다. 잘 살고 싶다. 이제는 맹목의 눈가리개를 벗어던져버릴 때가 왔다.